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발행인 노트] 나같은 너와 우리

산다는 것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일이다.  성취의 기쁨은 잠시,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린다.  76년을 산 나같은 늙은이도 뛰어 넘어야할 산이 아직도 커보인다.  끝도 갓도 없는 욕심, 미련, 후회, 실망, 무례, 배신…이런 낱말들은 우리 삶의 허들임이 분명하다.  누구나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내가 마음 속에서 피터지게 싸운다.  끊임없이 쾌락을 탐하는 ’육체의 내‘가 있고,  짐짝처럼 등에 지고 다녀야하는 ‘정신의 내‘가 있다.  둘은 하나이면서도 격렬하게 싸운다. 그게 인간이다.  때로는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나의 경우 요즈음 들어 특히 힘빠지는 일은 소외감이다.  나만 그런가? 세상이 자꾸 날 밀어내려는 것 같고,  집안팎으로 말빨이 옛날처럼 서지 않는 경우 더더욱 그렇다.  뒷방 영감이라 했던가?  힘 빠진 노인네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말일 거다. 언감생심 여기저기 끼고자하는 늙은이가 염치 없단 걸 안다.  “이제 내려놓을 때도 되었다”는 아내의 조언은 금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무언가 지껄여야 살아있는 것 같고,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고, 청년들처럼 꿈을 꾸어야 살맛이 난다.  누가 봐도 한심스러운 영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 우리 업계 한 경영인이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우리 업계 초창기 어른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의 노고가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지요. 언제 한번 자리 좀 마련해 주시죠. 조그마한 감사라도 표시하고 싶습니다.” 그는 진지했다.  감동이었다.  과두시사 蝌蚪時事, ‘올챙이적의 일‘을 잊지 않는 그의 진지함, 그것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 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그의 마음은 곧 그의 인격의 표시였다.  그것은 여유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유태학살범 아이히만 재판정을 취재했던 한나 아랜트의 명언이다.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악의 평범성“은 인간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악은 무사유,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출발한다”는 거다.  그는 덧붙인다, “사유한다는 것과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그는 나같은 얼뜨기 기자에게도 고언을 남겼다.  “타인과 관계를 맺어라. 주위의 악과 계속해서 싸워라. 예술가처럼 쓰고 생각하라. 자유를 존중하고 경계를 뛰어넘어라.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행동하라.” 

 

사유한다는 것은  ’나같은 너와 우리‘를 생각하며 산다는 말이다. 그가 누구이든 그가 나라고 생각한다면 ‘나와 너는 우리이고, ‘우리는 인간이다.  영감이 곧 나고 너이며 ‘우리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똑같이 고 살아간다.  남녀노소 함께 어우러져 살며 서로에게서 배우고 생각하면서 감사해야하는 이유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이기적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은 사유하지 않는다.  뒷방 영감이 말한다.  “너희들도 그날이 온다,  선두부터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승객들의 운명처럼 먼저와 다음이라는 시차가 있을뿐…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