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지심도 병인 양 하며…”
내가 사는 서브디비젼은 연못을 중심으로 82가구의 이웃들이 모여 산다. 연못에는 거위 어미와 아비 그리고 두마리의 새끼가 살고 있었다. 오후 석양빛을 받으며 느릿하게 물위를 떠가는 그들을 지켜보는 일은 내 일상 속 작은 휴식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먹이를 해결하지만, 가끔은 주민들이 주는 먹이를 먹기도 한다.
작년 봄 어느 날 거위 한마리만 꾸욱 꾸욱 거리며 물과 뭍 위를 바삐 드나들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세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동네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녀 봐도 나머지 세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연못 건너편 사는 이웃이 비보를 전해 주었다. 자기 집 뒷뜰에서 백조와 새끼 두마리가 오소리를 닮은 날짐승에게 온몸이 뜯겨 죽어 있었다는...꾸욱 거리며 다니는 거위는 구사일생한 아비였다. 두달이 지나도 밤낮으로 꾸욱 거리며 동네를 헤매이는 거위를 위해 크레이그리스트를 뒤졌으나, 거위는 찾을 수가 없어 오리 식구들을 입양해 연못에 풀어 주었다.
한쌍을 사려했더니 오리농장주가 한마리 암놈과 두마리의 숫놈을 권해서 그리하였다. 거위와 오리들은 '따로 또 같이' 방식으로 어울리며 지냈다. 먹이를 주면 서로 경계하다가도, 나머지 시간에는 더러 함께 어울리며 노닐기도 했다. 이들이 사는 모습을 보노라니 우리집 남매가 어릴 적 토닥거리며 으르렁 거리다가도, 작은 일에 서로 의기투합해 우애를 보여 주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혼자 남은 거위가 밤낮 없이 꾸욱 거리며 울지 않아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이들이 어우러져 살게 한 나 자신이 마치 사랑의 메신저 인 양 뿌듯하기까지 했다.
지난 4월 어느 날 거위가 보이지 않고 오리들만 여느 때처럼 보였다. 며칠이 지나도 보이지 않아 분명 궂은 일에 대한 예감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접한 인공지능에 상담을 의뢰했다. 거위는 죽음이 임박하면 동료나 가까운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격리되어 죽음을 맞이 한다는 인공지능의 대답이었다. 가족들은 비명횡사 했지만 애비 주검은 주검이라도 묻어 주려고 사방 팔방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후 이웃들은 나를 만나면 백조의 행방을 묻기도 하고, 더러는 포기하라고도 했다.
며칠 뒤 HOA 스태프를 맡고 있는 데이빗이 A4 용지 만한 액자를 들고 내 집을 찾아왔다. 우리 커뮤니티 앨범을 만드면서 찍어 두었던 백조 가족 사진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울컥해 하는 아내를 보자니 내 맘에도 찌 이 잉 하는 울림이 퍼지는 듯 했다. 봄부터 매일 하나의 알을 선물해 주던 오리가 6월초 부화를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입양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우리집 구석 수국 뒤에 자리를 잡았다.
20일이 지나도록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아 걱정이 되어 인터넷을 뒤졌더니 오리들의 부화기간은 28일이나 되었다. 허기에 잠시 알들을 떠나 먹이를 찾을까 싶어, 수국 바로 앞에 찐계란을 잘게 부셔 물에 말아 놓기도 했지만 전혀 입을 댄 흔적이 없었다. 오리가 놀라지 않을까 해서 HOA에 양해를 구하고 근처 잔디는 깍지도 않았다.
부화 시작한 지 22일 째 되던 날, 아연실색할 일이 생겼다. 수국옆에 깨진 오리 알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깨진 알 안쪽에는 짧은 털들이 묻어 있어 세상구경도 못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된 새끼 오리들의 흔적 이 분명했다. 수국 뒤를 봤더니 어미 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반항도 못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지 깃털하나 보이지 않았다. 20일 넘도록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어찌 작은 반항인들 할 수 있었겠나를 생각하니 삼킨 적도 없는 바늘이 가슴 속 여린 부분을 꼭꼭 찔렀다. 부화하는 오리 주위에 팬스라도 둘러주지 못한 죄책감이 가위눌림이 되어 잠을 설치게 했다.
올해는 분명 쥐띠에게 이별수가 있음이 분명하다. ‘부모형제 잃는 것보다 낫지’ 라며 위로 하려 해도, 먹이를 주면 손길이 닿을 듯이 가까이 와 꾸욱 거리던 거위와 멀리서 내 차만 봐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달려오던 오리 생각하면 눈두덩과 콧잔등이 강초를 끼얹은 듯 씨큰하다. 때 이른 더위 속 연못 가족들이 겪은 잔혹사에 서늘해진 가슴으로 입양할 오리가족을 찾아 크래이그리스트를 클릭하는 즈음이다.
<필자: 임기정>